'소나타'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뭐.. 국내 자동차업체에서 만든 차이름에도 있는...
소나타는 고전주의 음악을 감상할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악곡을 설명할때 '도입부' 라든가 '1주제', '2주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소나타' 라는 음악적 형식을 이루는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적 형식으로서의 소나타는 17세기에 등장해 고전주의 초기인 하이든 시대에 이르면 기악곡 작곡의 일반적
원칙으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고전주의 시기의 기악곡을 대표하는 형식이 소나타입니다.
특히 하이든은 이 소나타 형식을 완성해 기악곡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바로 그 소나타 형식을 더욱 세련되게 양식화하면서, 거기에 자신들의 독창성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죠.
소나타형식이란 악곡 전체의 틀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1악장은 긴장감 넘치는 빠른 악장(소나타 알레그로), 2악장은 그 긴장을 이완시키는 느린 악장,
3악장은 춤곡인 미뉴에트이거나 해학적인 스케르초, 마지막 4악장은 다시 1악장의 템포와 조성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뜻합니다.
결국 '빠르게-느리게-미뉴에트-다시 빠르게'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소나타 형식'이라는 개념은 한 악장의 전개 방식을 뜨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두 개의 대조적인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음악을 구축해나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확고하게 구축된 이 전개방식은 낭만주의 시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의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같은 작곡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말하자면 적어도 200년간 영향력을 행사해온 막강한 '작곡 매뉴얼'이었던 셈입니다.
특히 교향곡이나 협주곡, 독주소나타, 실내악의 1악장은 거의 예외없이 소나타형식으로 작곡됐다고 봐도 됩니다.
적어도 1악장에서는 소나타 형식이 하나의 상식으로 통용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장시절에 잠깐 배웠던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 이것이 소나타 형식이라고 볼 수 있죠.
제시부는 말 그대로 주제를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제시부 직전에 간혹 도입부가 놓이는 경우도 있는데, 크게 신경쓸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시부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작곡가는 제시부에서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주제를 소개합니다.
첫 주제는 힘차고 활달한 반면에 두번째 주제는 내향적이고 서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 원칙을 따릅니다.
첫 번째 주제가 끝나면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짤막한 '경과구'입니다.
첫 주제와 두 번째 주제를 잇는 일종의 다리라고 볼 수 있죠.
이 지점에서 멋들어진 조바꿈이 일어나면서 대조적인 분위기의 두 번째 주제로 연결됩니다.
음악을 들을 때 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때도 첫 문장과 첫 단락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첫 문장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서 글 전체의 구조와 뉘앙스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발전부'는 제시부에서 내놓은 악상을 더욱 발전시키는 부분입니다.
소나타 형식의 '3부분 구조'에서 가장 자유로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시부에 등장했던 두 개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때로는 두 주제 모두가 변형되면서 전개됩니다.
빈번한 조바꿈이 일어나고 때로는 주제 자체가 애초의 형태와 많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향을 떠나 자유로운 방랑과 모험을 펼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경우에 따라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옵니다.
발전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다시 원래의 형대로 복귀하려는 짤막한 경과구를 거쳐 '재현부'로 들어서죠.
재현부는 말 그대로 제시부의 재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첫 주제와 대립적 조성을 취했던 두 번째 주제가 첫 주제와 같은 조로
조바꿈돼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경과구에서 슬그머니 조바꿈이 일어나면서 두 번째 주제가 첫 번째 주제와 같은 조성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제시부에서 나타났던 두 주제 사이의 상반성이 해소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죠.
그리고 이어서 종결을 뜻하는 '코다(Coda)'가 등장합니다.
도식화해보면,
도입부(때때로 있음) - 제시부(1주제-경과구-2주제) - 발전부(주제의 갖가지 변형-경과구) - 재현부(1주제-경과구-2주제)
- 코다. 이것이 소나타 형식의 기본구조입니다.
뭐, 외울필요는 없고 음악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떠올려 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을 자주, 반복해서 듣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소나타 구조를 자연스럽게 감지할 수 있게돼죠.
하이든은 소나타 형식의 완성자로 거론되는 작곡가입니다.
특히 그는 교향곡과 현악4중주에서 이 형식의 전형을 선보였습니다.
하이든은 1791년 영국 런던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교향곡 작곡가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합니다.
중간에 다시 빈으로 돌아와 체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모두 두차례 영국을 방문해 약3년간 현지에서 활약했습니다.
이 무렵 발표했던 12곡의 교향곡을 '런던 교향곡' 또는 하이든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흥행업자 잘로몬의
이름을 따서 '잘로몬 교향곡'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그중에는 교향곡 99번처럼 빈에서 작곡된 곡도 포함돼 있습니다만, 어쨌든 당시의 하이든은 런던의
콘서트홀에 모여든 청중을 의식한 듯 대담한 화성과 강력한 리듬의 교향곡들을 속속 써냅니다.
그럴수밖에 없던게, 당시 런던의 콘서트홀에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만 있었던게 아니라 청중의 대다수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부르주아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이든은 그들의 귀를 즉각적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음악을 들려줘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런던 부르주아 청중의 음악적 취향에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향곡 94번은 특히 그렇습니다.
하이든은 청중의 지루함을 단숨에 날려버릴 팀파니의 강력한 타격을 2악장에 슬며시 넣어둡니다.
느린 악장의 약박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 강력한 포르티시모의 음향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향곡은 초연 직후에 '놀람'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하이든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하이든은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로라우'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수레를 만드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영주의 성에서 일하던 요리사였습니다.
하이든이 부모의 품에서 살았던 것은 여섯 살 때까지 였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복 여동생의 남편에게 아들을 맡겼던 것이죠.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수레만드는 목수'라는 가업을 잇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동생이 살았던 하인부르크는 로라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번화한곳이었습니다.
애초에 슬로바키아 땅이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영토로 편입된 지역인데,
하이든의 고모부는 그곳에서 교사로 일했고 교회의 성가대장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하이든은 하인부르크에서 음악이라는 세계로 첫발을 내딛게 된거죠.
고모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우면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던 하이든은 마침내 빈의
슈테판 대성당 소년합창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유명한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이죠. 그곳에서 10년간 노래하다가 변성기가 되어 쫓겨납니다.
그후 모르친 백작 집안의 음악가로 고용되는 20대 후반에 이를때까지, 하이든은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귀족의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약10년간 고생스러운 세월을 보내며 작곡을 독학으로 습득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이든의 삶을 크게 3등분 한다면, 거기까지가 1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막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음악가로 고용된 1761년에 시작됩니다.
마지막 3막은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했던 1790년, 하이든이 '귀족에게 종속된 음악가'라는
사회적 지위를 벗어나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선도하던 대도시 런던에 첫발을 디디던 시절에 개시됩니다.
그렇게 하이든은 가난한 하층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의 '음악하인'으로 30년간 일했고,
마침내 자본주의적 음악가로 대성고을 거두는 대하 드라마를 펼쳐 보입니다.
결국 하이든을 설명하는 코드는 두가지인 셈입니다.
그 하나는 '다산의 음악가'라는 것이고, 또하나는 77년의 생애를 통해 봉건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고스란히 보여준 음악가라는 점입니다.
하이든이 영국 런던에 발을 디딘 것은 1791년이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이든은 1790년 12월15일에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서 이듬해 1월1일 영국에
상륙했고 2일에 런던으로 들어섭니다.
그때부터 이른바 하이든의 '런던시절', 12개의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시기가 막을 올립니다.
그런데 당시 런던은 유럽 최고의 음악산업 중심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빈보다도 음악산업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인데다 그 진행속도도 유럽의 어느나라보다 빨랐습니다.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출현해 경제권을 한창 장악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회의 전체적 부(富)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물론 그 부의 축적은 농업계층에 속해 있다가 노동자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이 희생을 담보로 형성된 것이겠죠.
그런데 바로 그것, 빠른속도로 늘어난 물적 토대야말로 음악산업을 융성시킨 절대적 요인이었습니다.
흥행업자들은 연주회를 기획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티켓을 팔았고,
음악출판업자들도 악보 판매가 늘어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음악가들이 런던으로 몰린 것은 당연합니다.
1789년에 일어나 1794년까지 이어졌던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역사적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혼란해 보이는 사회적 상황을 동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파는 유럽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배를 타고 런던을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보다 '인기'를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역사적장면은 귀족에 예속돼 있던 음악가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들어서는
음악사적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이든이 런던에 당도했던1791년, 당시 그곳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악스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헨델이었습니다.
물론 헨델은 1759년에 세상을 떴으니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의 인기는 여전히 시들지않고 있었죠.
당시에 런던의 흥행업자들이 주최했던 그 어떤 음악회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렷던
헨델 추모 음악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합쳐 1,000명 가까운 인원이 동원됐던 그 거대한
음악제에 견줄 수 없었습니다.
'헨델 코메모레이션' 이라고 이름붙은 그 음악제는 헨델 사후 25주년(1784)이 되던 해부터
계속해 치러졌는데, 하이든이 런던에 도착했던 1791년에도 어김없이 열렸습니다.
하이든은 그곳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오라토리오'(oratorio)란 '종교적 극음악'을 뜻합니다.
극음악이긴 하지만 오페라처럼 연극적인 무대를 만들어놓고 성악가들이 연기를 하면서 노래를
하는것은 아닙니다.
극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이 있기 하지만 그냥 합창석에서 노래속의 가사로만 극의 줄거리를 전달하는
음악입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바로 이 장르를 대표하는 중요한 걸작이라 할 수 있죠.
특히 2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할렐루야'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어쩌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하이든은 일종의 문화적 쇼크를 받았던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음악의 규모 때문이엇을 것입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전, 그러니까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일하던 시절에
지휘했던 오케스트라는 고작 20명 남짓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자그마치 1,000명에 달하는 규모에 정신이 아찔할만큼 놀란것은 당연하죠.
아울러 그것은 이후의 하이든이 음악의 규모를 확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중 '할렐루야'를 듣던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헨델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최고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전기 작가인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런던에서 헨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때 음악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온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네"
하이든이 당시 받았던 충격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창작에 자극과 영감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죠.
하이든은 영국에서 12개의 교향곡으로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1795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귀환하는데
<천지창조>는 그 이듬해 부터 2년여에 걸쳐 작곡된 음악입니다.
이어서 작곡한 또 하나의 오라토리오 <사계>와 더불어 하이든의 말년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힙니다.
<천지창조>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음악입니다.
하이든은 성경의 '창세기'와 밀턴의 '실낙원'을 저본으로 삼은 영어 대본을 들고 귀국했는데,
그것을 하이든의 음악적 조언자였던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이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그 대본에 하이든이 곡을 붙인 것이죠.
전체가 3부분으로 나뉘고 모두 34곡이 담겨 있습니다.
1부와 2부에서는 세 천사가 등장해 신이 천지를 창조하는 6일 동안의 과정을 노래하는데,
그 천사들의 이름은 가브리엘, 우리엘, 라파엘입니다.
3부에서는 에덴동산에 살았던 두 명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전체 연주시간은 1시간 50분 남짓인 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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